때와 시기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 사도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 사도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려고 하는 때가 지금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가 갖고 계시는 자기 권한으로 결정한 것이니, 너희들이 알바가 아니다.”(행 1:6-7. 새번역)

돈, 권력, 재산, 명예가 현대인들을 만족시킨다고 한다. 이 위에 마음씩 착하고 예쁜 아내와 자녀들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항상 즐겁고 정말 오래살고 싶을 것 같다. 그러나 매일 밥 먹고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질병이나 어려운 일로 고통과 고난으로 이어진다면 이 세상에 오래동안 살려는 미련이 얼마나 있겠나 싶다. 물론 정말 힘든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벗어나고 싶어도, 죽지 못해 사는 사람도 있겠고, 힘들고 어려워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실날같은 소망으로 견디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사도행전에 나온 배경은 모두 로마제국 밑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깔려있다. 식민지배를 받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나를 포함해서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잘 모른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 함께 사시는 나의 어머님은 아직도 뼈에 사무친 말들이 매일 나오는 것을 보면 그 고통은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나의 어머님은 금년 95세인데 우리와 식사도 함께 할 정도로 매우 건강하시다. 맛있는 반찬이 나오면, 맛있게 잡수시다가 꼭 한마디씩 하시고 넘어가신다. “그 지긋지긋한 일본놈들! 숟가락 젓가락 까지 다 가져가고, 우리는 마당에서 가마니 덥고 잤다.”

여기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의 어머님와 같이 아픈 마음을 갖고, 예수님께 질문했을까? “주님,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려는 때가 이 때입니까?”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열심히 경청한 제자들은 하루속히 그런 나라가 오길 정말 기대했을 것 같다. 자신들이 개, 돼지로 여겼던 이방인들인 로마제국이 자기 나라를 빼앗고, 이래라 저래라 매사 간섭하고 있으니 못마땅하다 못해 하루속히 그 통치와 압제를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식민통치가 되면 항상 강대국에 빌붙어서 어떻게 하든지 이 땅 위에서 잘 먹고 잘 살려고 설치는 매국노나 협잡꾼들을 보면,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정의가 하루속히 와서 회복시키는 것이 정말 간절했을 것이다. 사실 하나님 나라가 어떤지 조금 맛도 봤다. 시루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는 장관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매일 끼니 걱정하지 않고, 산다는 생각 만해도 지금처럼 미래가 불투명하고 절망적인 삶이 핑크빛으로 변할 것만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자 제자들의 질문이 더 애잔하고 간절하게 들린다.  “주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려고 하는 때가 지금입니까?”

예수님은 이런 마음을 알면서도 애써 무시하시는 것인지, 예수님은 대답은 겉으로 보면 감정이 빠져버린 퉁명스러운 대답처럼 보인다. 예수님이 하신 갈릴리 아람어 방언이 경상도 말과 비슷하다면, 호기심과 궁금함으로 순진하게 예수님의 눈을 쳐다보는 제자들에게,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때와 시기? 아부지 혼자 안다 아이가. 나도 모른다. 니도 몰라도 된다.” 어찌보면 참 야속했을 것이다. 우리가 그 때와 시기를 미리 알면 얼마나 좋을까? 멀리도 아니다. 단  몇 분, 몇 초라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안다면 이 지구 역사는 정말 달라도 한참 달라졌을 것 같다. 천안함 사태 때 수많은 장병이 수장되지 않았을 것이고, 세월호 때 꽃다운 학생들도 떼 죽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미래를 알기위해 수없는 노력을 인공지능까지 동원하여 예측을 한다지만, 미래의 일을 매 순간 안다는 것 자체가 인간에겐 불가능하다. 이 한계에 무모하게 도전하면서, 예수님의 재림 시간을 정확하게 안다고 큰소리치며 사람들을 몰아갔던, 수많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날뛴 행보들이 다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이 궁금증을 해결하려는 욕망으로 또 얼마나 많은 그런 종말론자들이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때와 시기”라는 말이 서로 비슷하게 들려 같은 말을 강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영어 성경에는 “때”를 대부분 “시간/때”(times)로 번역했는데, “시기”는 “기간”(periods), “철”(seasons), “시대”(epoch)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했다. 어떤 언어든지 서로 비슷한 말들이 있어도,  비슷한 두 말이 완전하게 똑 같은 말은 사실상 없다. ‘때’에 대한 한국어 사전의 정의는 ‘어떤 순간이나 부분’으로 보고 있고, ‘시기’는 ‘어떤 일이나 현상이 진행되는 시점’으로 되어 있다. ‘순간’ ‘부분’ ‘시점’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또 혼동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진행되는 과정이 강조되느냐 아니면 일이 일어나는 시점이 강조되느냐이다. ‘때’라고 번역된 단어의 신약 그리스어는 ‘카이로스’인데, 일어난 시점이 강조되는 말이고, ‘시기’라는 말은 과정이 중요시되는 ‘크로노스’이다. ‘크로노스’라는 말은 조금 쉽게 이해하려면 연대기 순으로 차근차근 기록하는 이조실록이나 왕비열전등과 같은 역사책을 연상하면 된다. 그래서 성경책인 역대기를 영어로 ‘크로니클즈’ (Chronicles)라고 했다. 물론 역대기도 우리가 현재 아는 진정한 역사적인 관점으로 차근차근 기록했다고 보기에는 확연히 다른 성경만이 갖고 있는 특성이 있지만 말이다. 

‘카이로스’가 시간적으로 기록하는 그 기간을 의미하기 보다는 역사적으로 흘러가는 그 기간에 어느 한 순간 찰라적으로 일어난 시점으로 강조하는 것은 참 의미심장하다. 오랫동안 닫힌 창문에 짙게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 방을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커튼을 확 열어 젖히는 그 순간, 빛이 쏴악 하고 쏟아져 들어오는 바로 그 순간인 그 “때”, 즉 카이로스이다.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 1:15)에서 “때”는 바로 그 순간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 위대한 성육신의 순간이 ‘카이로스’이다. 그런데 그왁 같은 의미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다”(갈 4:4)에서 사도 바울은 ‘카이로스’를 ‘크로노스’로 사용했다. 이 둘의 간단한 예를 봐도,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를 상황에 따라 섞어서 쓰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이 두 단어를 꼭 구분해야 하는가 라는 의구심도 들 수 있다. “때와 시기”는 그 때를 강조하기 위해 수사학적으로 반복해서 썼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우리 삶의 미래에 대해서 우린 몰라야 사실상 행복하다. 그래야 장난질을 덜 하고, 뭔가 이루려는 열망도 더 갖는다. 몰라야 인생의 역동적인 반전도 맛볼 수 있다. 미리 안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만들기 위해 인간은 얼마나 더 많은 조작과 조종으로 우리 삶을 허비할까? 예수님은 도적같이, 아무도 생각하지도 않을 때 오셔야 준비한 사람들이 그 복을 누리는 공평함이 있다. 가난한자나 부자나, 잘난 사람이나, 그러지 못한 사람들 모두, 몰라야 현실에 더욱 충성할 수 있는 삶의 아이러니는 인생에서 신비이자, 하나님이 만드신 삶의 아름다움이다.

2019-01-03T07:49:28+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