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 요즘처럼 혼탁한 세상에서 어떻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신자들에게 성령은 신비 그 자체이다. 부활하신 예수의 영이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약속하신 영이시다. 성삼위 일체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신자를 주로 시인하게 만드는 영이시다. 때로는 강력하게 임하여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는 영이시지만, 때로는 의식조차 못하는 상황에서도 택하신 사람들 영 안에 들어오신다. 성령에 대한 균형잡힌 지식이 부족하면 성령을 인간적인 힘을 권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는 말을 듣자, 제자들도 그 영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올 것을 기대했다. 지긋지긋한 로마 압제에서 하루속히 벗어나는 꿈같은 날이 오면 얼마나 좋으랴! 아니, 그럴 수 있다고 확신도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의 질문이 매우 당당하고,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주님, 이스라엘을 회복하려고 하는 때가 지금입니까?” 사도행전 전후 문맥을 아는 우리들이 볼 때, 사도들의 이런 당돌한 질문은 엉뚱할 뿐 아니라, 예수님이 의도에서 한참 빗나간 질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힘들고 아픔 시절을 보내야 했던 그들의 가슴 속 깊은 곳에 품었던 절박한 소망이기도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절박함에서 나온 질문과는 전혀 다른, 제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답변을 하셨다.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의 증인’이 된다. 가방 끈도 그리 길지 못하고, 아직 성령도 받지 못한 사도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정말 궁금하다. 유대 땅이야 자신들이 속한 곳이라고 하지만, 사람취급조차 하지 않는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인이 된다? 정말 이해가 안되는 말이었다. 게다가 ‘땅 끝’은 지금도 많은 신자들 사이에 해석도 분분한데, 당시에 어떻게 이해했을까?
지금 우리들에게 ‘증인’은 일상생활 보다는 사건을 목격한 법적인 용어로 더 자주 쓰일 때가 많다. 증인은 ‘듣고 본 사실을 증명할 수 있거나, 진술할 수 있는 사람’으로 국어사전에 나와 있다. 이 말대로라면 증인은 ‘듣고 본 사실’에 대해 증명하거나 진술을 해야 한다. 없는 것을 만들어내서 들었거나 봤다고 하면 안 된다. 사건에 대한 사실 여부를 증거하거나 진술하거나 증명하는 사람인 증인은 자신의 역할과 기능이 분명하다. 본문에서 ‘나의 증인’이라고 했듯이, ‘나’라는 예수님에 관한 사실을 드러내어, 본대로, 들은 대로, 경험한대로 진술해야 한다. 예수에 대해 사실이 빠지고, 자기 멋대로 진술하고 증거하면 거짓 증거, 즉 위증죄를 범한다. 십계명에서도 이러한 행동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못 박았다. 거짓 증거는 인간 세상 질서를 헤치는 최악의 죄 중의 하나이다.
‘나의 증인’이라는 말은, 신자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신자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예수’가 빠지면 빈껍데기라는 말이다. 그런데 갈수록 신자가 증거할 ‘예수’가 빠지고, 수많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대체되고 있다. 예수 대신, 나, 교회 이름, 교단 이름, 선교사 이름, 협의회 이름, 등등이 난무한다. 증인은 증인의 역할을 하고 내려가야 한다. 증인을 통해 얻을 것은 잃을 것도 없다. 일반 세상에서도 증인의 역할한다는 것은 번거로움과  고통과 고난과 생명의 위험도 감수해야 해서, 증인보호 프로그램까지 가동하고 있다. 악이 득세한 세상에서 예수가 만왕의 왕이요, 세상의 심판자요, 우리 구원자라고 당당하게 증언할 때, 전혀 예기치 않는 곳에서 고난과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지난 3-4개월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국정농단이라는 현실에 위증을 밥 먹듯이 하는 뻔뻔한 사람들을 우리 너무나 많이 봤다.  서로 상반된 전혀 다른 말을 하면 둘 중 하나는 완전한 거짓말쟁이다. 당당하게 상반된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소름이 끼쳤다. 인간이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지 자기들 입으로 사람들에게 그대로 증언했다. 그러면 우리 신자들 사이에 진실한 증인들이 있을까? 며칠 전에 2017년 한국기독교 사회적 신뢰도에 관한 설문 조사 결과를 기윤실에서 발표했다. 불신자들이 기독교인들을 “별로 혹은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가 무려 64.2%이고, “매우 혹은 약간 신뢰한다”가 겨우 8.9%였다. 진실을 드러내는 예수의 증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초라한 성적표였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기독교는 더 성장한다(?)는 이상한 통계도 봤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신자는 “예수의 증인”이 아닌, 사람들이 신뢰하지 않는 자신들만의 집단을 만들고 끼리끼리 살아가는 사교집단이 될 뿐이다. 사람들 사는 세상에 신뢰가 깨지면 지옥이 된다. 지금처럼 SNS가 발달된 세상에서는 가짜 뉴스까지 설쳐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상황에서우린 더욱 더 ‘예수의 증인’에 대한 본질적인 것을 추구해야 한다. 어떻게? 세례 요한이 모범을 실천하면 된다. “그는 흥해야 겠고, 나는 망해야 한다”(요 3:30). 나의 모든 행동과 말에서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예수가 흥하도록 하면 된다. 자, 이 험한 세상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나보다 예수 이름이 더욱 흥하게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2019-01-03T07:48:37+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