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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성경이란

성경활용
작성자
제순 정
작성일
2019-02-25 11:41
조회
259
오늘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성경과 성경번역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유명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매일 유튜브에서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라, 제가 나누려고 하는 이야기에 관심을 많이 갖진 않겠지만, 누군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얻는다면 그것에 기뻐하면서 연재를 하려고 합니다. 뭐든지 시작하기 전에 저자의 간단한 소개를 하듯이 소저 또한 쑥스럽지만 간단하게 하려고 합니다. 제가 현재 가진 직책은 다양합니다. 성경번역선교사, 국제번역자문위원, 아시아언어문화연구원장, 한동대교수, 박사, 목사… 직책 다양한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 없다고 하지요? 맞습니다. 제가 가진 많은 직책들 모두 가사에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이 많은 직책 중에서 1986년부터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변하지 않았던 나의 신분은 ‘성경번역선교사’(GBT, Global Bible Translators)입니다. 선교사라는 이름이 지닌 부정적 긍정적 의미가 참 많지요? 그렇지만 저는 그런 평가에 그리 게의치 않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선교사로 외국에서 19년, 한동대가 있는 포항에서 11년 동안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꽤 많은 사람들이 성경번역에 알고 계시지만, 30여년 전에는 대부분 생소했습니다. 저는 성경번역을 하기 위해 싱가폴에서 기초 언어학 공부를 했고, 아프리카 가려고 영국에서 비자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한동안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곳에 발로 밟지도 못하고, 가려고 한 번도 마음조차 먹어보지 못한 파푸아뉴기니에 가고 말았습니다. 원하지 않았던 나라라서 처음에는 더욱 낯설었습니다. 그곳 메께오 부족에 들어가 그들의 말을 배우고, 언어를 분석하고, 알파벳도 만들고, 나중에는 신약성경을 완역해서 봉헌도 했습니다. 저보다 최찬영 성서공회 번역선교사가 계셨지만, 소수부족에서 언어분석을 하고 성경을 봉헌 사람이 제가 처음이라고 합니다. 그런 후 IMF로 한국 경제가 망했을 때, 분에 넘치게도 전액장학금이 나와 미국에서 박사(PH.D)공부를 마치고, 다시 파푸아뉴기니로 돌아갔지만, 곧 제가 속한 국제본부(SIL, Summer Institute of Linguistics)에서 마닐라에서 아시아인들을 가르치라는 명을 받들어 마닐라에서 2년 동안 교수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우리 선교사들은 종종 떠돌이처럼 돌 때가 있는데, 마닐라에서 잘 정착하고 살력 하는데, 지금 제가 원장으로 있는 한동대 아시아언어문화연구원이 태동되어 2005년 한국에 오게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한동대 대학원에서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 아프리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시간이 나면 짬을 내어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을 다니면서 성경번역 자문위원으로 현지 번역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성경번역에 관한 글을 적으려니 나에게 갑자기 찾아온 성경에 대한 배경을 조금 해야할 것 같습니다. 저와 제 가족들은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무교(샤머니즘)와 불교의 풍습 속에서 살았습니다. 저희 가정이 기독교를 수용하기 전까지 이런 전통을 고집스럽게 이어가신 분은 제 어머니였지요. 한달 내내 아프시다가 절간에 가는 날은 날아갈 듯하여 식구들 모두들 종종 의아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제가 교회와 첫 만남은 초등학교 4학년쯤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 친구가 크리스마스 날에 교회당에 가면 과자 많이 준다는 복된 소식에 저 또한 난생 처음 교회당에 다녀왔습니다. 과자 먹고 기드온 성경책을 선물로 받은 기억이 나는데, 우리 집안에 두 신을 두지 못한다는 어머님의 강권에 그만 그 성경 책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그 성경책을 불태운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 성인이 될 때까지 애석하게도 제 주변에 기독교를 소개한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었고 교회를 다녀보질 못했습니다.
기독교가 제 집안에 찾아온 때는 제 아버지가 암으로 투병하실 때인 1978년 봄이었습니다. 우연히(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기독교 집안으로 시집 간 큰 누님이 성경 책을 들고 아버님 병상에 찾아 왔습니다. 병원에서도 손을 들고 집에서 남은 여생 살게 한지라 아버님은 고통 때문에 잠간도 평안하게 계시지 못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아버님은 병상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까지 받으셨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었지요. 그런데 신기한 일도 생겼습니다. 고통 중에 신음하면서 어머님에게 찬송가를 불러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55세였던 어머님은 평생 교회를 다녀보신 적이 없습니다. 글자도 겨우 읽으시는 분이라 찬송가를 알 턱이 없지요. 그래서 찬송가 가사를 읽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찬송가 가사를 읽기만 해도 아버님은 평안하게 주무시는 것을 종종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배우자의 사별이 인생에서 가장 큰 충격 중의 하나지요? 그런데 제 어머님은 그 보다 더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 어머님은 아들 셋을 이미 잃었습니다. 두 아들은 어려서 잃어서 그래도 쉽게 잊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셋째 아들은 다 커서 잃었고, 재로 변한 아들을 뿌리면서 제 부모님은 실성한 사람같이 행동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셋째 아들은 태권도 유단자에 신체도 건장하고, 백마부대로 월남까지 가서 살아서 돌아온 ‘정병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름에 월남에서 돌아오고 몇 달 뒤인 가을에 몸이 아프다고 갑자기 눕더니 무려 2 주도 안 되어 죽어버렸지요. 병명은 ‘급성신장염.’ 지금 생각하면 아무래도 고엽제 같지만 다 지나간 일이라 증명할 방법이 없지요.
셋째 아들도 병원에서 손을 놓아 버렸고, 집에 데리고 왔었는데 그 아들 살리겠다고 동네 시끄럽게 사흘 동안 굿하고 몸부림을 쳤지만, 아들은 매정하게 제 부모님 손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런 고통과 아픔이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있는지라, 남편마저 빼앗기니 세계관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생명을 주관하신 분이 따로 계신다.” 또 알 듯 모를 듯한 말도 내 뱉으셨습니다. “어려서 빛을 세 번 봤는데, 그것이 하나님이신 줄 알았어야 하는데…” 그리곤 기독교로 전향하셨습니다. 저는요? 이런 어머님 앞에 무슨 다른 선택을 가질 수 있는지요? 제가 장남인지라 저의 어머니 눈치도 살피고 위로해 드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집단으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심 많은 저는 그 후 2년이 더 지나야 했습니다.

당시 나는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밤에는 대학에서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어머님은 현재 94세이면서 노인성 치매 아주 초기가 시작되었지만 아직도 건강하시고 제 집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식사 때마다 ‘공산군’ ‘일본놈’ 한번씩 정말 망할놈이라고 한번씩 욕하시고, 곧 이어서 외할머니는 양녕대군 16대 손, 할아버지가 승지공이셨다고 자랑을 하십니다. 제 아버님은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 양반 집에 혼인하려고 제 어머님 집안을 그렇게 기웃거리셨다는 등…. 틈만 나면 반복되는 고리탑탑한 금수저(?) 집안 이야기가 어이가 없다 못해 허탄하여 이제는 말씀하시기도 전에 제가 다 미리 말해 버립니다. 그런 이야기가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저는 어려서부터 가난한 집안에서 겨우겨우 먹고 살아서 ‘그런 일이 정말 있었나?’ 라는 의구심까지 들기 때문입니다. 위계질서와 가문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유교 악습의 후유증으로 이해하고 매번 귓전으로 흘러 넘겨 버립니다. 그리고 제가 사족을 달지요. “몰락한 양반 가정!”
성경 이야기를 하려다가 곁길로 가버렸습니다. 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직후 마음도 정리하고 군복무를 마쳐야했기에 신체검사를 하러 갔습니다. 아들 셋을 이미 잃고, 남편까지 잃으신 지라, 제가 군에 간다고 하니 내색은 안하셔도 마음이 어지러웠던 것 같습니다. 신체검사 받는 당일 제가 집에서 출퇴근하는 보충역(당시 방위)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하셨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조금 더 희생하고 조금 더 양보하는 것인데 그런 신앙 성숙은 안되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제 어머님의 기도를 정말로 하나님이 긍휼로 여겨졌나 봅니다. 내 왼쪽 발이 평발로 판명 나 1년 보충역을 했습니다. 저는 제가 평발인 줄 그 때서야 처음 알았습니다.

보충역을 마치고 1979년 7월에 은행에 복귀했지만 직장생활에 점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고,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늦게 철 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주변에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80년 2월 말에 5년 6개월 다녔던 은행에 사표를 냈습니다. 누님 둘 다 시집갔고, 남동생 하나는 자기 먹고 살기도 벅찼으며, 월세를 내면서 겨우겨우 살아가는 상황에서 생계를 책임진 제가 사표를 냈으니 제 어머님이 가장 불안해하셨지요. 당장 병원도 쉽게 못 갈 처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저는 무책임하게 그만 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계산을 했었습니다. 공부는 계속 일등을 하여 자신도(?) 있었기에 등록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고, 은행 퇴직금으로 졸업할 때까지는 굶지 않고 견딜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일이란 참 예측하기 힘듭니다. 게다가 역사적인 상황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역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합니다. 공부하겠다고 직장을 그만 둔 당시 한국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극렬하게 요동치는 상황이었습니다. 알다시피 전두환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나라가 어지러웠고, 대학생들은 전국적으로 반정부 데모를 했습니다. 군사정권은 그 데모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모든 대학교 정문에 탱크를 배치하여 학생들을 협박했습니다. 폭력 잡배들을 청소한답시고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들면 닥치는 대로 잡아서 정신개조라는 미명하에 잡아 족쳤습니다. 정말 억울한 사람들이 많이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우리 시대에 최고의 비극인 5.18 민주화 운동이 터졌습니다. 저는 1993년에 난생 처음으로 광주 무등산을 밟아 봤습니다. 같은 동족을 무참하게 짓밟는 그 미친 짓 앞에 저는 너무 눈물이 나와 한참을 삼켰습니다. 그런 짓을 저지른 전두환과 그 일당들은 그것을 북한이 했다고 떠들고, 지금도 어쩔 수 없었다고 온갖 변명 늘어놓고 피둥피둥 잘 살고 있습니다. 교문 앞 탱크 때문에 학교 도서관 출입은커녕 불심검문으로 까닭 없이 체포될까봐 하루종일 집에 콕 쳐박혀 책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영학 교수가 되려고 은행을 그만 뒀는데, 그 꿈을 펴기도 전에 일이 터진 것입니다. 그래도 그 꿈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다 지치면, 선물로 받은 성경책을 틈틈이 봤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 때 제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위대한 빛이 제 좁고 어두운 가슴을 헤집고 들어왔습니다.

좌절, 절망, 어지러움, 혼돈과 아픔 가운데 80년 봄을 보내고 있는데, 너무나 충격적으로 구원, 꿈, 도전, 희망 등이 담긴 성경 내용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성경을 읽어 내려가는데 괜히 눈물이 흘러내려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제 형님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에도 저는 울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신 분 운다고 돌아올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완악한 제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냥 울고 있는 저를 봤습니다. 그 후로 종종 어떤 때는 헤프게 웁니다. 저를 울린 그 성경이 저를 사로잡고, 저는 그 책과 관련된 사역을 평생하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이 번역된 책이었습니다.
저를 잡아 삶의 방향을 바꾸고, 지금까지 30년 동안 번역자로 자문자로 섬기도록 만든 책이 번역된 책이었다니… 이제야 번역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저를 잡아 삶의 방향을 바꾸고, 지금까지 30년 동안 번역자로 자문자로 섬기도록 만든 책이 번역된 책이었다니… 이제야 번역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앞으로 번역에 관한 내용들은 2012년에 제가 성서공회 국제 번역 자문위원인 웬드랜드와 함께 출판한 “문학적 기능등가 번역 (1-2권), 태학사”이라는 책을 기반으로 적어볼까 합니다.  사실 이 책을 낼 때 시간에 쫓겨 출판하느라 말이 매끄럽지 못했고, 내용도 쉽게 표현하질 못했습니다. 책임을 통감하고 여기 연재하면서 이러한 점들을 최대한 줄여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기쁨을 더 주려고 힘든 여정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자 저와 함께 번역 이야기에 한번 들어가서 서로 유익을 얻는 귀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